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비드 아레야노 (문단 편집) == 생애 == 다비드 아레야노는 산티아고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영향에 따라 스포츠와 친숙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산티아고에서 학교에 다녔지만 아리카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곳은 사관학교, 신학교, 예술학교 등과의 교류가 있었고 아레야노는 일반 학교에서 1군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학생이자, 마가얀의 소유자였던 엔리케 아베요에 의해 마가야네스 클럽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9년에 17세의 나이로 산티아고의 1부 팀에 데뷔하였으며 동시에 학교 연합 토너먼트에서도 뛰게 되었다. 곧 그는 마가야네스에서 최다 득점자의 자리에 올랐으며 각종 대회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칠레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대학 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대학 연합팀에도 뽑히는 등 그는 두각을 나타내었고, 1923년 무렵에는 메트로폴리타나 리그에서 활약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 대표팀]]에도 형 프란시스코와 함께 선발되었다. 당시 칠레는 [[CONMEBOL 코파 아메리카|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아예 [[승점자판기]] 수준이었던 터라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다]][[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른]]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팀들]]에 밀려 3전 전패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아레야노가 파라과이를 상대로 유일한 골을 넣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했다. 1925년, 새로 창설된 [[콜로-콜로]]의 창단 멤버이자 설립자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아레야노는 주장을 맡게 되었다. 한편, 국가대표팀에서는 칠레의 불참으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한 대회를 건너뛰고 [[1926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칠레|자국에서 열린 다음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레야노는 여기에서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다. 여기에서 아레야노는 4경기에 출전하여 2차례의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7골을 쓸어 담았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칠레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역대 첫 승을 신고함과 동시에 2승으로 3위로 대회를 마쳤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1927년 5월 2일, 콜로-콜로의 [[유럽]] 투어.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레알 바야돌리드 CF|레알 바야돌리드]]와의 경기가 있었다. 경기 도중 불행하게도 아레야노는 수비수와 충돌하면서 자신의 다리로 배를 가격하게 되었다. 이 충격으로 인해 [[복막염]] 증상이 나타났지만,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해 24세의 나이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비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팀의 주장을 위해 콜로-콜로는 지금도 자신들의 홈구장에 그의 이름을 붙여[*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다비드 아레야노|다비드 아레야노 기념 경기장]]. 칠레 대표팀이 A매치 때 홈구장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구장이 바로 이곳이다.] 기리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